스킵네비게이션

HOME
글자크기

다박사 과학정보

참여마당
다박사 과학정보
'[중앙일보][윤석만의 인간혁명] 500년 뒤 지구엔 바보만 남는다, 왜' 글 입니다.

[중앙일보][윤석만의 인간혁명] 500년 뒤 지구엔 바보만 남는다, 왜

분류 : 공동체 명 부서명 : 부서 명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자 : 2018.01.09

조회수 28870

첨부파일 : No File!

[윤석만의 인간혁명] 500년 뒤 지구엔 바보만 남는다, 왜

"고학력 여성 출산기피, 열성인자만 유전"
영화에선 미래 인간 IQ 80 이하로 떨어져

덴마크 연구 "스마트폰 사용, 지능 하락"
문명발전으로 IQ 향상' 플린법칙' 깨져
이미지·동영상 중심 미디어 소통도 원인

"언어의 한계는 인식하는 세상의 한계"
책·글자 멀어질수록 논리·추상력 떨어져
500년후 바보가 된 인간들 Idiocracy

2006년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이디오크라시. 500년 후 인간의 지능이 크게 낮아진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렸다. [영화 이디오크라시]


인간의 지능은 과연 계속 진화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재밌는 답변을 해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2006년 미국에서 개봉한 ‘Idiocracy’입니다. ‘Idiot(바보·멍청이)’와 ‘Democracy(민주주의)’의 합성어죠. 그렇습니다. 바보들만 남은 세상이란 뜻입니다. 풍자 작가로 유명한 마이크 저지가 메가폰을 잡았고, 코미디 영화의 대부인 루크 윌슨(조 바우어 역)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잠시 동안 흥미로운 영화 속 세계로 들어가 보시죠.

2005년 미국은 군부대 안에서 비밀 실험을 합니다. 바로 냉동인간을 만드는 거죠. 위험한 프로젝트이다 보니 어느 누구도 선뜻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가장 별 볼일 없는 병사, 소위 ‘고문관’으로 통하는 조 바우어가 주인공으로 뽑힙니다. 이름부터 유명 미국 드라마 ‘24시’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최고의 정예 요원 ‘잭 바우어’를 패러디했죠. 조는 1년만 잠들었다 깨면 된다는 설명만 듣고 곧바로 냉동수면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고로 조는 1년 후에 깨어나지 못하죠. 시간이 흐르고 군 수뇌부는 냉동인간 실험 자체를 까맣게 잊고 맙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2505년의 어느 날. 실험실 인근에 산처럼 쌓인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무너지면서 조는 긴 잠에서 깨어납니다. 졸지에 500년 후의 미래로 오고 만 것이죠.

과연 미래는 얼마나 발전해 있을까. 조는 큰 기대감을 갖고 미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람들이 모두 바보가 돼 있었습니다. 모든 게 자동화 돼 인간은 머리 자체를 쓸 일이 없는 세상이 된 거죠. 사람들은 오직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것들에만 반응합니다. 고차원적 사고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소파에 앉아 감자튀김을 먹으며 TV를 보거나 게임에 몰두하고 있을 뿐입니다.

  

 

영화 속에서 인간은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것에만 열광한다. 고차원적인 사고는 사라진지 오래다. [영화 이디오크라시]


조가 깨어나고 얼마 안 돼 오스카상 시상식이 열리는데 여기서 8개 부문을 휩쓴 작품은 90분 동안 사람 엉덩이만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TV 예능 중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한 남자가 몇 시간 동안 허벅지를 맞는 장면을 보여주는 게 고작입니다. 가장 압권은 백악관의 주인인데요. 포르노 배우로 유명세를 떨친 엽기적인 레슬링 스타가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올라 있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요. 영화에선 500년 후 미래가 디스토피아로 펼쳐지는 이유를 풍자적으로 설명합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자아실현을 위해, 또는 아이를 키울 만큼 사회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느껴 출산을 기피합니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다산을 하고 아이들 교육에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TV와 게임에만 노출되고,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돼 시간이 흐를수록 지능이 낮아졌다는 겁니다.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 소파에서 감자칩을 먹으며 TV를 본다는 뜻으로 TV 등에 빠져 고차원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단면을 비판하는 말이다. [네이버]


영화는 열성 유전자만 계승돼 500년 후엔 지구인의 평균 지능이 80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허구적 상상력이 가미된 영화라곤 하지만 일부 불편한 부분도 있습니다. 다소 우생학적이고 인종차별적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똑똑한 사람을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개신교를 믿는 전통적인 백인 중산층)로 묘사하거나, 그렇지 않은 이들을 히스패닉으로 설정한 부분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말하고 싶어 하는 요지는 명확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치고 있다는 거죠. 영화 속에서 인류는 식량감소, 환경오염 등으로 파멸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 누구도 여기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결국 지구상에서 가장 똑똑한 냉동인간 조가 미국의 국무장관을 맡아 이런 위기를 타개하려고 애씁니다. 과연 조는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할 수 있을까요?
Idiocracy’는 온갖 화장실 유머 코드와 미국식 저질 농담으로 가득한 B급 영화지만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풍자의 메시지는 매우 선명합니다. 정신없이 웃다보면 어느새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버리지만, TV를 끈 이후에 뭔가 깊은 생각과 고민거리를 남긴다는 거죠. 요즘 사회가 흘러가는 모습을 가만 보고 있노라면,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가 영화의 설정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술 발전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인간이 머리 쓸 일은 갈수록 적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와 비교해 우리가 외우는 전화번호, 노래가사는 얼마나 될까요. 운전을 예로 들면, 예전에 잘 찾아다니던 길도 요즘은 내비게이션 없이 잘 못 갑니다. 간단한 암산도 하기 귀찮아지면서 산술적 능력도 많이 떨어졌죠. 그럼 과거처럼 그런 걸 일일이 다 외우고 다녀야 하느냐, 물론 그건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과거에 비해 우리가 머리를 훨씬 적게 쓰고 있다는 겁니다.


 

사진을 누르시면 '윤석만의 인간혁명(http://news.joins.com/issueseries/1014)'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실제로 디지털과 미디어 기술의 발전 때문에 사람의 지능이 떨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대 토마스 티즈데일 박사가 군 입대 남성의 IQ를 조사했더니 1998년과 비교해 십 여 년 사이 1.5점 정도 떨어졌습니다. 네덜란드와 영국, 호주 등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고요. 연구진들은 이 같은 지능 하락의 이유를 두 가지로 꼽고 있습니다. 첫째는 고학력 여성의 출산 기피, 둘째는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 사용의 확대입니다.

이런 결과는 ‘플린 효과(사회발전으로 정신적 활동 많아져 IQ가 오른다는 분석)’와 정반대입니다. 1980년대 뉴질랜드 심리학자인 제임스 플린은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평균 IQ가 10년마다 3점씩 오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사이 영양 상태가 개선되고 삶이 풍요로워지면서 IQ도 크게 높아졌다는 설명입니다. 플린은 “진화적으로 인간의 지적 능력이 높아졌다기보다는 삶이 윤택해지고 머리 쓸 일이 많아지면서 IQ가 올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는 있지만, 기술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개개인이 머리를 쓸 일은 점점 줄고 있죠. 앞으로는 더욱 그러할 것이고요. 언제든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으로 쉽게 검색을 할 수 있는 대신, 조용히 앉아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은 줄었습니다. 모든 정보를 간편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과거처럼 책을 찾거나 도서관을 가는 일도 없어졌고요.
 

인간의 뇌는 3중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생존과 본능에 대한 부분은 파충류의 뇌, 감정에 대한 것은 포유류의 뇌, 이성과 관련한 것이 인간의 뇌다. [네이버]

그렇다면 머리를 안 쓴다는 건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걸까요? 이는 언어 활동을 통한 인간의 사고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뇌는 보통 3층으로 이뤄졌다고 하죠. 가장 깊은 곳에는 본능을 탐지하는 파충류의 뇌, 중간층엔 감정을 관할하는 포유류의 뇌, 제일 바깥엔 이성을 뜻하는 인간의 뇌가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파충류에서 포유류로, 또 다시 사람으로 발전해 온 게 아니라 위 3가지를 모두 갖고 있다는 거죠. 상황에 따라 어느 뇌를 쓰느냐가 달라지는 것이고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 번째 뇌, 즉 인간의 뇌가 기능하는 방식입니다. 인간의 뇌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전두엽이라 불리는 기관입니다. 전두엽의 가장 큰 역할은 언어를 관장하는 것이죠. 보통 전두엽이 모두 완성되는 시기로 남자는 30세 전후, 여자는 25세 전후라고 합니다. 특히 청소년기까지 전두엽에 필요 이상의 자극이 가거나, 덜 발전하게 되면 성년 이후 뇌의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그럼 왜 언어가 중요하느냐? “언어는 존재의 집”(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는 언어로 구조화 돼 있다는 뜻인데요. 이를 풀어서 말하면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개념화하기 위해선 언어 없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깁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볼까요? 우리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방식은 보통 2가지입니다. 첫째는 오감을 통한 생각입니다. 듣고 보고 느끼는 거죠.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시각적 이미지고요. 예를 들어 “퇴근 하고 무슨 밥을 먹을까”와 같은 단편적 생각은 머릿속에 이미지로 그려집니다. 때에 따라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매콤한 냄새가 상상되기도 하죠. 어쨌든 이런 생각의 가장 핵심은 이미지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겁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중앙포토]


두 번째는 언어를 통한 사고입니다. “다음 주 기획안은 뭘 써야하지” 같은 복잡한 사고는 언어를 통해 이뤄집니다. 언어가 있어야 개념을 정의할 수 있고, 개념이 밑바탕 돼야 논리와 추론이 가능합니다. 즉,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고의 본질적 특징은 언어라는 것이죠. 현대철학자들이 인간의식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언어 분석에 집중했던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을 표상하는 건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가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영어 문화권에 있는 사람과 한국어 문화권에 있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생각의 틀이 다르죠. 대표적인 게 존댓말입니다. 존댓말과 존칭이 발달해 있는 한국어는 말 자체로 위계서열이 나뉘죠. 초등학생도 한 학년만 높으면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말을 놓습니다. 그러면서 권력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죠.
그러나 영어를 쓰는 미국에선 그렇지 않죠. 10살짜리 아이와 70세 어르신도 서로 이름을 부르며 수평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물론 어른에 대한 예우는 있겠지만 우리처럼 말을 통해 위계서열이 생기고, 관계가 수직적으로 결정되진 않죠. 그래서 최근에는 일부 기업에서 임직원 모두 존댓말을 사용하고 직급 대신 별명을 부르기도 합니다. 카카오 부사장 출신인 정혜승 청와대 뉴미디비서관의 조직에서도 닉네임을 쓴다고 하죠. 수평적 의사소통을 위해서 말입니다.

존댓말 뿐 아니라 말의 어순도 생각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국어는 ‘나는 너를 사랑해(주어 목적어 동사)’라고 말하죠. 주어 다음이 바로 목적어입니다. 나의 감정 뿐 아니라 너와의 ‘관계’도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영어는 ‘I love you(주어 동사 목적어)’ 순입니다. 너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의 감정과 의견을 먼저 생각하는 거죠. 영어권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감정을 나타내는데 익숙한 이유도 이런 영향이 큽니다.


 

미국 의회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구텐베르크 성경'. [중앙포토]


이처럼 언어는 생각을 지배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언어 사용은 갈수록 줄거나 일차원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과거엔 인간의 소통 수단은 말과 글이 유일했습니다. 특히 글은 2000년 넘는 시간 동안 인류의 독보적인 지식 전승 수단이었죠. 특히 인간의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는 말보다 글이 더욱 효과적이었습니다.

미학자인 진중권씨가 쓴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이란 책에는 재밌는 사례가 나옵니다. 러시아의 학자인 알렉산드르 루리야(Alexander Luria)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 러시아의 농촌 마을을 관찰했습니다. 그곳에는 문맹인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루리야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합니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아주 다르다는 거였죠.

예를 들어 우리들에게 망치와, 도끼, 톱 같은 걸 보여주면 바로 ‘연장’이라고 외칩니다. 공통된 것들을 범주화할 수 있는 추상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루리야가 관찰한 농촌 마을 사람들은 추상을 할 줄 몰랐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톱은 나무를 썰고, 도끼는 통나무를 가르죠. 굳이 내게 어느 쪽을 버리라고 한다면 도끼가 될까요”처럼 딴 이야기를 한다는 거였죠.


 
북극곰 어미와 새끼. [중앙포토]
 
일상에서 쓰는 삼단논법도 이곳 사람들에겐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북극의 곰은 모두 하얗습니다. 노바야제믈랴 지방은 북극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노바야제믈랴에 사는 곰은 무슨 색일까요” 하고 물으면 우리는 바로 “흰색”이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문맹인 사람들은 “글쎄요, 저는 하얀 곰을 한 번도 본적이 없네요” 식으로 말한다는 거죠. 추론과 논리는 인간에게 거저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언어, 특히 글을 통해 계발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규정합니다. 특히 글은 ‘이성’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선 이런 언어가, 특히 글과 활자매체가 소외받고 있죠. TV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자리를 내주기 시작하더니 스마트폰 등 디지털기기의 발달로 이제는 지난 2000여년 간 누려왔던 지식 소통 수단의 왕좌 자리를 완전히 내준 상태입니다.
 

연령별 독서인구. [통계청]

그렇다보니 일상에서 책 읽는 모습도 보기 어려워졌죠. 한국 남자 대학생이 하루 책을 읽는 시간(42분)은 인터넷을 이용하는 시간(127분)의 3분의 1밖에 안 됩니다. 한국인 10명 중 셋(33.2%)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고요.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만 해도 지하철 안에서 독서하는 사람을 왕왕 볼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런 모습을 찾긴 힘들죠.

책과 글자 대신 현대 사회에선 이미지와 동영상이 우선입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글보다 시청각 이미지를 선호하죠. 요즘 아이들은 무언가를 찾아볼 때 네이버로 단어를 검색하기보다 유튜브로 동영상을 찾는 데 익숙합니다. 문자와 SNS에 길들여져 단문 중심으로 소통하고 장문의 글이나 책은 읽기 어려워하죠. 요즘엔 대학생들조차 신문기사 정도의 글을 읽는 것도 어렵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결국 미래의 인간은 깊이 있는 생각에서 점점 멀어지고 추론과 논리 능력도 퇴보할 가능성이 큽니다. 영화 ‘Idiocracy’처럼 평균 IQ가 80 이하로 떨어지는 극단적인 미래가 오진 않겠지만 인간의 지적 능력이 점점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만큼은 씻기 어렵습니다.
 

카카오톡과 페이스북 등 온라인 공간에서의 대화는 폭력적으로 흐르기 쉽다. [중앙포토]


디지털 공간에서 벌어지는 현대인들의 소통 방식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온라인에서 가장 많이 이뤄지는 공적인 글쓰기는 SNS나 게시판, 댓글 달기 등인데 이런 글을 살펴보면 비이성적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온갖 욕설과 험한 말들로 도배되는 경우가 많죠. 그들에게 사이버 상의 글은 오직 배설의 도구로만 쓰이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분들이 있겠지만 말이죠.

우리가 명심해야할 진실 한 가지는 평소 쓰는 언어가 저속하면 그 사람의 생각 수준도 낮은 것이고, 바르고 교양 있는 말을 쓰면 그 사람의 내면 또한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언어가 곧 생각을 결정하고, 생각에 따라 행동과 습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데이비 총독의 대 원주민 포고령, 1816년’(1828~1830년). 대항해시대에 오스트레일리아에 처음 도착한 백인들이 원주민들과 그림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상황을 묘사한 작품. 문명의 발달이 덜한 문화권에선 형이상학적인 걸 뜻하는 추상적인 단어가 적다.[중앙포토]


‘인간혁명’에서 여러 번 강조했듯,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발달만큼 정신문화의 성숙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매우 어두울 겁니다. 시대가 변해 우리가 쓰는 소통의 도구가 이미지와 동영상이 주가 되는 건 막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2000년간 인간의 지성사를 대표해 왔던 언어, 특히 문자의 역할이 사라지는 건 깊이 생각해 봐야하겠습니다.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는 곧 내가 갖고 있는 언어의 한계”라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말처럼 언어가 끝나는 순간 우리의 생각도 멈춰버리기 때문입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