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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강연
'[수톡]9/20(수)함께 하는 등대 탐험대' 글 입니다.

[수톡]9/20(수)함께 하는 등대 탐험대

분류 : 공동체 명 부서명 : 부서 명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자 : 2017.09.20

조회수 3373

첨부파일 : No File!

○강 연 일 : 2017년 9월 20일(수)


○강 연 자 : 심 지 원학예사(국립등대박물관)


○강연내용


* 학예사라는 어떤 직업인가요?

학예사라는 단어가 많이 낯서실텐데요, 영어로는 큐레이터라고 하며 박물관의 전시 기획, 유물 수집 및 연구, 교육프로그램 운영 등 박물관의 전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 TV나 영화에서 흔히 등대를 보는 보게 되는데요, 등대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요?

대영백과사전에 의하면 등대는 항해자에게 지침을 주기 위하여 불을 밝히는 구조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해상교통이 시작된 4천여년 전부터 등대가 출현하였으리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장작불을 지펴 이용하는 불탑의 형태를 띠었으며 

 

항로표지의 하나로 밤에는 빛으로, 낮에는 형태나 색상으로 바다에 있는 배의 안전한 항해를 돕는 신호등 역할을 합니다. 항구에서 하얀등대나 빨간등대들을 많이 보실 수 있는데요, 빨간등대는 우현표지로 우측에 암초 등 장애물이 있음을 뜻하며 해상에서 부두 쪽으로 올 때 항로의 오른쪽에 설치되어 있어서 부두가 왼쪽임을 알려주고 하얀등대는 좌현표지로 좌측에 암초 등 장애물이 있음을 뜻하며 해상에서 부두 쪽으로 올 때 부두가 오른쪽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노란색 등대는 선박들에게 주변 해상을 주의하라는 표시로 설치하고 있습니다.

 

* 등대은 언제 세워졌나요?

세계 최초의 등대는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입니다.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의 현재 알렉산드리아 입구의 길고 좁은 수로에 세워진 거대한 건축물을 말하며, 파로스 등대라고도 불립니다. 모든 등대의 원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지만 지진으로 무너져 지금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 등대의 높이는 약 135, 야자수를 태워 불을 피웠고, 유리 반사경을 사용해 40떨어진 곳에서도 불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확한 완공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28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치세에 크니도스의 소스트라투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완공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등대는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높이가 약 130 미터에 달했으며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등대 건물은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으나 건립 후 1600여년이 지난 13세기 지진에 의해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이후 이집트에서 등대의 잔해로 카이타바이 요새를 만들면서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알렉산드리아 동쪽 항구의 바다 속에서 등대의 잔해를 발견하여 1995년 공개하기도 하였습니다.

파로스등대는 최초의 등대이면서 후세에 많은 영양을 끼친 등대이기도 합니다. 파로스는 여러 언어에서 "등대"를 뜻하는 낱말의 어원이 되었고, 건축 형태 또한 후대의 건축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파로스 등대와 같은 시기에 지어진 아부키르의 무덤과 로마 시대 히스파니아(스페인)에 세워진 헤라클레스의 탑도 파로스 등대의 모습을 본 뜬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0083월 국제과학사학술지 제14권에서는 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 등대를 이용하여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였다는 기사를 수록하기도 하였습니다.

 

* 우리나라의 등대의 역사가 궁금해요

우리나라의 고문헌들을 살펴보면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에 김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해 천축 아유타국에서 허황옥 공주가 당도하였을 때 횃불로 위치를 알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이 항료표지의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의 운항을 위해 항로표지의 필요성이 강조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고기잡이가 나간 어선이 어두워지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그 마을 사람들은 해안이나 언덕에 올라가 횃불을 저마다 들고 비추고,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함성을 질러 마을의 위치를 배에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파표지와 음파표지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의 최초의 등대는 팔미도 등대로 1903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입니다. 팔미도는 연결된 두개의 섬이 마치 여덟팔()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와 같아 팔미도로 불렸다고 한다. 일본과 우리정부가 체결한 무역협약인 "조일통상장정"에 따라 조선왕조는 19036월 높이 7.9m, 지름 2m의 팔미도 등대를 세웠습니다. 현재의 팔미도 등대는 1903년 새로 만든 것으로 등탑 높이 26m에 회전식 등명기가 50까지 비추며, 10초에 한 번씩 빛을 발한다. 디오라마 영상관, 위성항법보정시스템 기준국 시설과 첨단 장비도 갖춰져 있습니다.

 

팔미도 등대는 인천상륙작전의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맥아더 사령부 예하의 조직인 켈로부대가 비밀리에 파견되었는데요, 인천상륙작전 당시 이들의 임무는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천항 서방 13.5km에 있는 섬이었던 팔미도는 인천만 전체와 주변 해상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이후였기 때문에 부대원들은 어민으로 가장해 도처에 깔린 지뢰들을 찾아내는 동시에 군함의 인천만 진입을 위해 해양의 상태 및 항로의 수심을 측정했습니다. 무쇠에 줄을 매달아 바닷속에 늘어트리면 뻘이 줄에 묻어 올라왔는데 그것으로 미루어 수심을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 50년 만에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날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로가 좁고, 물 빠지는 속도가 빨라 짧은 시간 내에 대형 함정의 이동이 어려운 이 날이 인천상륙작전의 디데이가 됩니다. 디데이 하루 전날 밤, 치열한 격전 끝에 등대 탈환에 성공하게 되어 9150시에 점등된 팔미도 등대의 불빛을 신호로 맥아더 장군 휘하의 261척 함대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 됩니다.

 

이처럼 등대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주변에서 크고 작은 역할들을 하여 어우러져 살아왔습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인 만큼, 등대의 의미와 역할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